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감습니다.
아름다운 풍경도,
손등에 느껴지는 따사로운 햇살도,
저 멀리 들리는 산새들의 지저귐도,
즐거이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바람결에 코끝을 스치는 감미로운 향기도,
…
보는 것과 듣는 것, 느끼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스스로의 내면을 지켜봅니다.
분명 뇌의 작용은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나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수많은 영상이 떠오르고 사라집니다. 이어지는 생각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의 명령에 따라 인간은 육체를 움직이고 환경에 대처하면서 삶을 영위합니다. 삶의 기간 동안 마음은 마치 개체의 주인인 양 행세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감정과 느낌, 판단과 생각 등 마음의 작용에 의지하여 인간은 살아갑니다.
마음의 작용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먹은 마음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때로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기도 하며, 많은 사람을 이롭게 혹은 해롭게도 합니다.
스스로 먹은 마음이 자신의 행·불행을 결정하며 건강과 질병을 가르기도 합니다.
마음을 바꿈으로써 암을 이겨낸 사람, 불가능에 도전하여 꿈을 이루어낸 사람, 마음 저편의 무의식에 도달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사람, 이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라니 마음이란 참 대단한 존재인가 봅니다.
인류의 모든 종교와 철학, 심리학의 역사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마음은 쉼 없이 질문하고 끝없이 요구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충족시켜도 그 순간뿐, 마음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 한다면 어떤 장사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 이것이 행복과 고통의 원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가사의한 존재인 마음일지라도 차근차근 그 실체를 알아나간다면 ‘마음이란 무엇인지’, ‘마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삶의 기간 동안 마음에 끌려가는 자가 아닌 마음을 부리는 자로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성性을 부여받아 나왔습니다. 생명체가 지닌 각각의 성性은 곧 하늘이 부여한 신의 다양한 면모로서, 꽃이 꽃으로 존재하고 소가 소답게 자라고 행동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성性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인간에게도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性이 있으며 이 주어진 천성天性대로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이 성性이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영혼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일종의 설계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존재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고 힘들고 괴로운 존재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착하고 어진 마음이 바로 이 성性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천성天性,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하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곧 인간 본래의 마음인 원심元心인 것입니다.
원심은 태어나면서 형성되는 후천적인 마음과는 달리 일원一元의 마음이기에 선과 악의 분별이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차별 없이 모든 생명체에게 무한히 베푸는 하늘의 마음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배고프면 울고 졸리면 잡니다. 도둑과 마주쳐도 방긋방긋 웃는 것은 본래의 마음인 원심이 때 묻지 않은 상태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性은 마음이 생겨나는 본바탕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대지로부터 자라나듯, 본래 성性은 ‘마음 심心’ 변에 ‘날 생生’ 자가 합쳐진 글자로, 마음이 생겨나는 본바탕을 의미한다.
착하고 어진 마음은 성性이라는 대지 위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과 같다.
삶이란 영혼과 육체, 마음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게 되면 하나가 되었던 영혼과 마음, 육체는 해체 과정을 겪게 됩니다. 영혼은 본래 왔던 하늘로 돌아가고 육체는 지수화풍으로 환원되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삶의 기간 동안 주인 행세를 했던 마음은 어떻게 될까요?
마음은 본래 영혼이란 본체가 육체라는 도구를 움직여 물질계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생성된 가짜 주인이었습니다.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영혼과 육체를 잇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지만, 육신을 벗게 되면서 중간자로서의 역할이 끝나기에 후천적으로 형성된 마음 역시 서서히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동시에 즉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죽은 지 4대代 후, 약 12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육신이 완벽히 지수화풍으로 환원되기까지 영혼과 음양으로 함께하다가 서서히 흩어집니다.
사후의 과정
살아생전의 업과 한이 많을수록 마음의 해탈이 늦어지고, 빛이 어두워진 영혼은 본향인 하늘로 돌아가기 어렵게 된다.
사람도 여자와 남자가 함께해야만 생명을 잉태하여 후손을 볼 수 있듯, 생명의 법칙은 음양이 함께했을 때에만 창조와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삶이 하늘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인 동시에 소중한 진화의 기회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음양으로 함께하는 살아있는 상태에서만 스스로를 재창조하여 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음을 중간에 두고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연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는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밝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밝고 긍정적인 마음은 영혼의 빛을 밝게 해주고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은 영혼의 빛을 어둡게 만듭니다.
같은 이치로 삶의 기간 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에 따라 영혼의 밝기가 정해지고 사후에 거할 환경이 결정됩니다.
죽음은 물질적 생애의 종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영혼으로서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죽음으로써 빛의 상태로 환원된 영혼은 그 빛의 밝기에 따라 머물 곳이 결정됩니다. 사후세계는 파장의 세계이기 때문에, 생전에 행한 대로 형성된 각자의 고유한 파장과 공명하는 파장대에서 영원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를 지녔을 때 스스로를 갈고 닦아 진화를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영혼에게 있어 이 세상은 학습의 장소이며 삶은 배움의 과정입니다.
생전의 마음 상태에 따른 영혼의 밝기
생전에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에 따라 죽은 후 영혼의 밝기가 결정된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죽음의 상태에서는 영혼의 밝기에 변화를 이루기가 무척 힘들다.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은 원심 그대로입니다. 마음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원심의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분별하지 않으며, 선입견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기는 갖가지 경험을 통하여 마음의 작용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쾌적함과 불편함을 느끼고 배고픔과 포만감에 좌절하거나 만족하면서 ‘나’라는 의식(자의식自意識)에 눈 떠갑니다. 자의식이 싹트면서 마음의 틀도 자리를 잡아갑니다.
마음이 강화되면서 원심은 마음에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마음 앞에서 원심은 절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원심은 빛 자체와 같아서 아무런 형태나 질감이 없으며 색깔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빛을 손으로 잡을 수도 몸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물의 외양이 보일 때, 우리는 그곳에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빛과 같은 존재가 원심입니다.
마음의 다양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원심이 그 바탕에 자리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원심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대한 흰 도화지만 있는 상태에서는 도화지가 인식되지만, 흰 도화지 위에 갖가지 그림을 그려놓은 후에는 그림에만 눈이 가는 것처럼, 흰 도화지 같은 영혼의 눈(원심)으로 사물을 바라보던 아기는 이제 마음이 그리는 다채로운 그림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나’라는 거짓된 자아(가아假我)를 낳습니다. 싫고 좋은 것을 가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합니다. 너와 나를 나누고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합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마음에 끌려다니면서 ‘진정한 나’를 잊은 채 살아갑니다. 마음의 그러한 분별심과 판단 작용이 우리를 원심에서 멀어지게 하고 끝없는 갈증과 불만을 낳습니다.
마음의 작용만큼 모순된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분별심과 판단 작용을 멈춘 상태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분별심을 낳게 한 마음의 작용이 또한 사람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하는 것이 참선의 요체입니다. - 마음을 가동시켜야만 사물을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지만, 마음을 가동시키면 원심에서 벗어나고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참선이란, 잃어버렸던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거짓된 자기를 떨쳐버리고 마음의 틀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원심으로 돌아가 하늘이 부여한 천성天性을 밝히는 일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된 나’인 과도한 마음의 작용을 쉬게 하여 영혼의 눈을 다시금 일깨우는 일입니다.
참선은 마음의 작용을 쉬고
영혼의 눈을 일깨우는 것
고금의 깨달은 이들은 한결같이 무심無心 혹은 무아無我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이 모두는 마음의 작용을 쉬고 분별심을 비워내어 원심으로 회귀한 상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무심의 경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무정하다. 만물을 지푸라기 인형같이 여긴다.
성인은 무정하다. 사람을 지푸라기 인형같이 여긴다.”
『도덕경 제5장』
부처님은 마음을 비운 경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식별識別 작용이 없어짐으로써 명칭과 형태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숫타니파타 1037』
예수님은 마음이 비워진 경지를 어린아이에 비유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장 3절』
본래 사람은 ‘영혼 → 마음 → 육체’로 향하는 내면의 질서에 따를 때 인간으로서 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삶의 진정한 가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은 영혼과 육체를 잇는 중간자요 통로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때문에 그 마음이 비워지고 가벼워질수록 마음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은 내면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불필요한 마음이 많아질수록 영혼과 육체를 잇는 통로는 좁아지고 영혼과 육체의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영혼으로부터 멀어진 삶, 그 속에서는 결코 참다운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비워 착하고 어진 본래의 마음, 곧 원심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마음을 비우고 원심을 찾아감으로써 내 안의 하늘인 영혼과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이며,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영혼과 마음, 육체가 하나로 재통합하는 길입니다.
이로써 마음은 본래의 주인인 영혼에 자리를 돌려주게 되는 것이며, 영혼에 마음이 따르고 그에 따라 마음이 육체를 움직이는,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참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원심회귀란 마음을 본래의 원심元心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영혼과 마음, 육체의 재통합을 이루게 한다.
하늘12진법 수련 중 참선이 여느 곳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원기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기의 파장은 조건 없이 베푸는 대우주의 마음의 파장이며, 무한한 생명과 사랑, 자비의 파장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생명의 원기의 파장은 참선하는 자의 마음을 대우주의 마음과 같은 마음, 곧 원심의 상태로 조율하게 됩니다. 또한, 생명의 원기가 지닌 초월적인 빛과 불의 속성은 마음속의 어둠을 밝히고 불필요한 마음의 찌거끼들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게 됩니다.
육체를 움직이는 일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마음의 작용 역시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입니다. 참선 역시 마음으로 행하기 때문에 원심에 도달하기까지는 에너지(기운)를 필요로 합니다. 하늘12진법 수련자는 생명의 원기를 수련함으로써 이러한 기운이 뒷받침되어 원심으로 회귀하는 데 있어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